순교성지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세리 성당

 

온양문화원 김형기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공세리 성당은 충청남도 지정기념물 144호이면서 한국관광공사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선정된 곳이다.

공세리성당은 1895년 6월 (양촌성당, 구합덕성당의 전신)에서 분리 창설되었으며, 공세리란 명칭은 조선시대 충청도 서남부의 조세를 보관하던 공세창(貢稅倉)이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충청도 내포(內浦) 지역에 위치한 공세리 일대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에 이미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에 의해 복음이 전래하였다. 이 후 박해기를 거치면서도 신앙을 보존하던 이 지역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에는 양촌본당의 관할 아래 있다가 1895년 6월 드비즈(Devise, 成一論) 신부가 공세리로 부임하면서 본당이 설립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드비즈 신부는 이미 매입한 10칸 정도의 기와집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꾸몄고, 1897년 6월에는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공세창이 있던 일대를 매입한 다음, 1899년 그 자리에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또 1905년에는 조성학당(1927년 폐쇄)을 세워 교육 사업에도 앞장서 공세리 발전에 기여 하였다.

한편 1920년대 들어 신자수가 증가하자 기존의 성당으로는 늘어나는 신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지휘 감독하여 1922년 9월에 현재의 고딕 양식의 서양식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이후 9대 주임 이인하(李寅夏) 신부는 1958년 초에 강당을 신축하였으며, 1971년 1월에는 13대 주임 김동욱(金東旭) 신부가 성당을 증축하고 별관을 완공하였다. 경내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3인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으며 경내에는 429.75m²(130평) 규모의 본당과 사제관, 피정의 집, 회합실 등이 있고,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각종 수림으로 쌓여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천주교 성지다.

성당 주변으로는 300년이 넘는 고목들과 주변 경관이 잘 어우러져 있어 ‘태극기 휘날리며’ ‘사랑과 야망’ ‘에덴의 동쪽’ ‘수녀 아가다’ 등등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CF 촬영 장소가 되었다. 성당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도는 오솔길에는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14가지의 중요한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를 하며 걷는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여 해마다 전국에서 수많은 순례객들이 묵상하며 걷는 중요한 길이 되었다.

공세리 성당 입구에는 조선시대 조세로 내었던 곡식을 저장하였던 조창인 공진창이 있었던 자리가 있다. 공세창은 공진창의 처음 이름이다. 현재의 공세리는 간척사업으로 인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없지만, 과거에는 마을 앞까지 물이 들어와 바다와 천이 만나는 수로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에서 충청도 각지에서 온 곡식을 모아 두었다가 일정한 시기에 한양으로 옮겼다. 초기에는 창고 없이 해안 포구에 곡식을 쌓아 두었으나 1523년 중종18년에 80칸의 창고를 마련하고 이름을 ’공진창‘이라 하였다.

공진창에는 곡식을 운송하기 위하여 적재량이 800석인 배 15척과 운반인 720명이 배치되었고, 조창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충청도 도사가 해운판관을 겸임하였고 1762년 영조38년 이후에는 아산 현감이 공진창을 관리하였다. 19세기 이후에는 조창 자체가 폐지되어 건물만 남아 있었는데 이후 1897년에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현재 창고지 주변에는 당시 세운 성벽이 남아 있다.

공세리 성당의 역사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이명래 란 사람과 ’이명래 고약‘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름 상표 출원 제품이기도 하고 당시 대한민국 가정집에 필수 상비약이었던 ’이명래 고약‘이다.

공세리 성당에 부임해 있었던 에밀드비즈 신부는 공세리 성당 본당을 직접 설계하고 건설을 지휘하였다. 당시 공세리 성당 건축에 참여했던 주민들 중에는 피부질환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를 본 신부님은 책에서 배운 지식으로 종기 치료약(고약)을 만들어 무료로 나누어 주었는데 효과가 대단히 좋았다. 이명래는 원래 서울에서 천주교를 믿는 신자였지만 천주교 박해가 심해지자 피난 차 공세리로 와서 에밀드비즈 신부님 옆에서 성당 일을 도와주며 지내다가 고약 만드는 비법을 전수 받은 후 우리나라 민간요법을 첨가하여 고약을 만들었는데 바로 이것이 해방 이후 가정상비약이었던 ’이명래고약‘의 시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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