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뒤에 가려진 슬픈 자화상, 유에민쥔
유에민쥔(岳敏君·Yue Minjun, 1962~)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더라도 그의 회화 작품은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활짝 벌린 입과 드러난 치아, 눈을 질끈 감은 채 과장되게 웃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남성의 얼굴. 유에민쥔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같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작가 자신이다. 작가는 왜 자신을 이런 모습으로 복제하여 그렸을까. 1990년대 중국의 사회적 분위기를 들여다보면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중국 사회는 개혁·개방 시대를 맞아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지식인들은 봉건시대 전통을 타파하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 체계를 모색했으며, 서구의 근대적 가치를 이상으로 삼아 신계몽주의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사상 개방과 함께 민주적 삶에 대한 열망은 높아졌지만, 집권 세력은 이로 인해 각종 사회 불안이 야기되자 정치 개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 자본주의 시장경제 유입에 따른 혼란도 존재했다. 인플레이션과 실업, 민영화로 인한 부작용이 날이 갈수록 커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9년 천안문 사태가 터지자 중국의 혁신 세력들은 방향을 잃고 분노와 공허감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예술가들의 사상과 가치관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로 인해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졌고, 급진적인 주제와 전복적인 예술적 정서가 나타났다. 중국식 아방가르드나 신형상(新形象) 회화도 이 시기에 등장한 흐름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글로벌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한 사조가 있었는데, 바로 냉소적 현실주의(Cynical Realism)다. 냉소적 현실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중국의 미술평론가 리시엔팅(栗憲庭·Li Xianting)은 이 용어가 공손하지 않은 유머와 무관심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심각하기보다는 농담을 담고 있고, 조소하면서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상태를 뜻한다는 것이다. 냉소적 현실주의 작품에는 개혁운동의 실패에 따른 분노와 미련, 이상주의와 허무주의, 가치의 부재 등이 뒤얽혀 나타난다.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 말에 미술 대학을 졸업한 중국의 냉소적 현실주의 작가들은 문화대혁명 같은 굵직한 사건을 겪은 기성 작가들과 달리 집단의식이 강하지 않고, 예술적 정서에 대해서도 다양한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냉소적 현실주의 작가들은 중국의 가치관이 급변하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89년 천안문 사태로 방황과 좌절을 경험한 세대로, 자신이 살아온 삶과 사회의식의 형태를 자유롭게 표현한다. 냉소적 현실주의의 대표적 작가가 바로 유에민쥔이다. 그는 익살스러운 웃음으로 상황을 표현하는데, 다소 괴이하게 느껴지는 표정에서 배어 나오는 무기력함이 캔버스를 장악한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유에민쥔(岳敏君), 한 시대를 웃다!> 전시에서 그의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다.
냉소적 현실주의의 미술 속에는 여전히 신념이 내재해 있었으나, 이러한 신념은 반어적인 방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유에민쥔이 1995년에 그린 <처형>이 그 예다. <처형>은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의 <1908년 5월 3일: 마드리드 수비군의 처형>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극도의 공포에 휩싸인 고야의 그림 속 등장인물들과 반대로 <처형>의 인물들은 마치 소꿉장난인 것처럼 모두 한없이 웃고 있다. 뒤의 배경에는 고궁 성벽이 보인다. 봉건사회 권력의 중심지인 고궁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림 속 인물들은 알지 못하고, 이로써 인물과 배경은 더욱 뚜렷한 대조를 이루게 된다. 정치적 이상과 사회적 윤리가 모두 좌절된 시대에 <처형>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웃음을 표현한다. 이 작품이 2007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중국 현대미술 최고가를 경신한 이유도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해학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노리는 것은 웃음 뒤에 감춰진, 그 반대의 허무한 정서이다. 이것은 누구나 접수할 수 있는 표현 방식이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문화 또는 중국 문학사와 관계가 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다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시장에서 눈길을 끄는 유에민쥔의 또 다른 작품은 2009년에 제작된 <잔디에서 뒹굴다>이다. 유에민쥔의 작업은 한 차례 큰 전환기를 맞이하는데, 그는 어느 순간부터 작품 속에 다른 인물들을 그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형상만을 복제한다. <잔디에서 뒹굴다>에 등장하는 두 명의 인물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나르시시즘으로 해석되는 이 작품은 개인주의가 팽배해진 시대 타인과 손해를 끼치지도 않고 교유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즐거운 분위기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자조하고 있는 모습이 드러난다.
내 작품 속 인물은 모두 바보 같다. 그들은 웃고 있지만, 그 웃음 속에는 강요된 듯 부자연스러움과 어색함이 숨어있다. 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아무 생각도 없이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표현한다. 이들은 곧 내 초상이자 친구의 모습이며 나아가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유에민쥔의 또 다른 작품 <방관자>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자조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씁쓸함을 남긴다. 강 한가운데 벌거벗은 한 남성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고, 배에 타고 있는 외국인들은 그 모습을 방관하면서 사진 찍기 바쁘다. 물에 빠진 남성은 체념한 듯 무기력하게 웃고 있다. 서구 사상의 유입에 의한 문화적 충돌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도 표출되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불안과 불신으로 나타나가기도 했다. 24/7 시장 체제, 즉 24시간 주 7일 내내 돌아가는 산업과 소비의 시대에 우리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유에민쥔은 혼란스러운 자본주의 상황 속 인간의 내재적 경험과 심리적 특성을 <방관자>를 통해 캔버스에 선명하게 그려냈다.
물론 누군가는 캔버스 속 웃는 얼굴이 실제로 행복해 보인다고 느낄 수 있다. 중국이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뤄냈기에 풍요와 행복의 표현으로 그의 웃음을 읽을 여지도 있다. 국내에서 유에민쥔의 작품이 복(福)을 불러오는 그림으로 알려진 것도 감상자들에게 각기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유에민쥔은 만약 내 그림 속 사람들이 행복해 보인다면 그건 감상자가 행복하기 때문 아닐까? 고독하거나 허무하게 보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중 어느 것도 오독이라고 규정짓고 싶지 않다라고 말한 바 있다.
유에민쥔의 작품은 특유의 표정과 풍자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 미술평론가 리시엔팅
거대한 자본과 권력 앞에서 무력한 인간 주체를 자조적 웃음으로 표현한 유에민쥔의 작품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유에민쥔의 웃음에서 결국 남는 것은 무력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해탈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유에민쥔은 모두가 절망하는 상황에서 도피를 택하지 않고, 해탈이라는 방식으로 사회에 마주하고 대항한다. 그는 시대에 대한 절망을 해학적인 웃음으로 표현함으로써 관객과 소통을 시도한다.